굶주림과 단식투쟁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면서 한국도 완전히 침몰했다. 그리고 오늘로 165일이 지났다.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단식투쟁을 멈췄지만, 진실은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다.
이생각 저생각을 하다가 굶주림과 단식투쟁에 관한 두 글을 그냥 인용하고 싶어졌다.
다음은 조정래의 태백산맥(太白山脈)에서 계엄사령관 임만수의 명령으로 한창길에게서 취조를 당한 김범우가 옥중에서 혼자 학병훈련 받을 때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배고픔 앞에서 어줍잖은 인간적 체면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차피 말먹이를 훔치면서 인간은 포기했으면서도. 변소 뒤로 돌아가 깻묵덩어리를 눈물겹도록 맛있게 먹고 있다가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하사관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자꾸 깻묵이 축이 나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네 놈이 범인이었다면서 가혹한 매질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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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 앞에서는 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일 수 있는가. 동물과 다름은 무엇인가. 시한부적 배고픔도 이리 견디기 어려운데 영속적인 굶주림은 얼마나 큰 형벌인가. 가난한 사람들, 아무리 몸부림쳐도 자신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짜여진 사회구조에 얽매여 있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인내심이 강한 것이 아니다. 사회구조룰 장악하고 있는 소수 부류들이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잔인한 것이다. 그런 사회구조는 기필코 바뀌어야 한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염상진을 그리워했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2권에서 인용
다음은 "누가 김영오 씨를 단식으로 몰고 갔는가?", 페리스코프(CC-BY-NC-ND)에서 나오는 '보비 샌즈 사건' 중 일부이다.
황혼기 대영제국의 문제들을 부각시키던 단식투쟁이 영국인의 자존심을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트린 사태가 1981년 일어났다. 북아일랜드 분리주의자 10명이 옥중 단식으로 목숨을 잃은 ‘보비 샌즈 사건’이다. 정부의 ‘불통’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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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의 단식투쟁은 담요투쟁과 오물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었다. 브렌던 휴즈가 이끈 이 단식이 40일을 넘기자 영국 정부도 양보할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의 요구에 대한 정부의 답변서가 런던을 떠나 벨파스트에 도착했을 때 휴즈는 답변서를 보지 않은 채 단식 53일째 날인 12월 18일 단식 중지를 선언했다. 동료 한 사람의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5개항으로 요약된 수감자의 요구는 실상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조치였다. 그 정도 요구를 들어주는 데 인색했다가 이듬해 재개된 단식투쟁으로 열 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상황이 닥치자 영국이 과연 문명국 맞느냐는 비판이 국내외에서 터져 나왔다. 5개항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 죄수복을 입지 않을 권리.
- 강제노역을 하지 않을 권리.
- 수감자끼리 자유롭게 교류하고 교육과 오락 활동을 조직할 권리.
- 매주 한 차례 면회를 갖고 편지 하나와 소포 하나를 받을 권리.
- 투쟁과정에서 박탈당한 혜택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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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십 명의 수감자들이 ‘북아일랜드 분리’도 아니고 수감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비폭력적 항의방법을 들고 나섰는데, 마땅히 취해야 하고 쉽게 취할 수 있을 것 같은 조치를 거부하며 줄줄이 죽어나가게 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좀 못마땅한 일이 있어도 영국 국민으로 살아가려던 온건한 사람들마저 “저게 우리 정부 맞아?”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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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잊어버리면 슬픔을 없는 듯 숨겨버릴 수도 있겠지…
슬픔이 한(恨)이 되어 거기 있는데 없는 듯 살 수도 있겠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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